
최근 방영되어 수많은 시청자들의 가슴에 깊은 여운을 남기고 종영한 박해영 작가의 12부작 드라마,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이하 '모자무싸')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나의 아저씨에서 삶의 무게를, 나의 해방일지에서 지독한 정체와 구원을 말했던 박해영 작가는 이번 신작을 통해 '무가치함'이라는 가장 날카롭고도 보편적인 현대인의 결핍을 정면으로 다루었습니다. 12부작이라는 비교적 짧은 호흡 속에서 작가가 던진 묵직한 화두와 인물들의 서사를 단식하듯 천천히 곱씹어 봅니다.
1. 등장인물: 결핍과 사투를 벌이는 자들
이 드라마의 가장 큰 미덕은 입체적이고 인간미 넘치는 캐릭터들에 있습니다. 드라마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겉보기엔 제각각 다른 삶을 사는 것 같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모두 '자신의 무가치함'이라는 거대한 벽 앞에서 피 흘리며 싸우고 있다는 공통점을 지닙니다.

황동만 (배우 구교환) : 대학 영화 동아리 선후배 사이인 '8인회' 중에서 유일하게 20년 동안 데뷔작을 내지 못한 인물입니다. 그럼에도 모임에서 가장 말이 많고 세상 모든 영화를 신랄하게 깎아내립니다. 스스로도 아무것도 가진 게 없으니 떠들기라도 해야 존재할 수 있다고 느끼며, 가만히 있으면 자신이 세상에서 사라져 버릴 것 같은 공포를 느낍니다. 존재감을 증명하기 위해 전날 일, 일주일 전 일까지 모조리 떠들어야 직성이 풀리는 산만한 성격입니다. 하지만 그런 그가 '한 여자' 앞에서는 애쓰지 않아도 가만히 있게 되고, 그녀의 말을 귀담아듣기 시작하면서 변화의 조짐을 보입니다. 스스로 "정신 차리면 매력 없어지는데"라며 능청을 떨지만, 자꾸만 정신을 차리게 만드는 인물을 만나게 됩니다.

변은아 (배우 고윤정) : 남자친구가 떠날 때마다, 혹은 회사에서 관계가 틀어질 때마다 아홉 살 때 버려졌던 '유기 공포'가 재발해 코피를 흘리는 아픔을 가진 인물입니다. 늘 언제든 버려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살아가던 중, 황동만을 보며 이 공포를 극복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게 됩니다. 영화판에서 확실히 도태되고 유기당한 것 같은 황동만이 왜 약해 보이지 않는지 의문을 가집니다. 은아는 나약함의 냄새를 귀신같이 맡는 능력이 있는데, 볼품없는 인간을 경멸하며 잘난 인간들과 한 몸이 되려 했던 자신의 엄마 역시 약한 존재였음을 알고 있습니다. 반면 동만은 나약할 조건을 다 갖췄음에도 상처받은 뒤 다음 날이면 다시 시시덕거리며 나타나는데, 은아는 그 모습에서 사춘기 소년처럼 열려 있는 천 개의 문을 보며 "이 남자, 된다! 되는 걸 보고 싶다!"라며 동만을 응원하게 됩니다.

황진만 (배우 박해준) : 본래 글에 재능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평범하게 순리대로 살아가던 인물입니다. 좋은 대학을 나와 좋은 직장에 들어가 무리 없이 살아가던 중, 어느 날 찾아온 목마름에 써 내려간 시가 신춘문예에 덜컥 당선되면서 인생이 도리어 꼬이기 시작합니다. 시를 써서만은 먹고살 수 없어 대학원에 진학했고, 교수 임용만 되면 평생 시만 쓰며 살 수 있을 줄 알았으나 '끔찍한 무능의 끝'을 경험하며 무너지게 됩니다. 이로 인해 자신뿐만 아니라 동생 동만까지 눈물을 쏟으며 형을 돌보게 만들었죠. 현재는 가슴에 무거운 돌덩이를 안은 채, 술로 하루하루를 버텨내며 용접공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박경세 (배우 오정세) : 황동만을 향해 철저한 우월감과 깊은 자격지심을 동시에 느끼는 인물입니다. "너와 나는 다르다"라며 같은 학교, 같은 동아리 출신이라는 이유로 동만이 자신과 동급인 척 비비고 들어오는 것을 극도로 혐오합니다. 자신은 이미 다섯 편이나 개봉한 감독인데, 20년째 데뷔도 못 하고 빌빌거리는 동만을 무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동만이 말이 많은 이유를 "남들의 무가치함은 샅샅이 찾아내려 하면서, 그 와중에 너의 가치 있음을 증명하려 들기 때문"이라며, 기어를 P에 놓고 액셀만 밟아 대며 에너지를 소진하는 형국이라 비판합니다. 동만이 영원히 데뷔하지 못하기를 바랄 정도로 그를 밀어내지만, 한편으로는 참다 참다 동만을 패고 나면 죄책감에 괴로워하는, 지독한 애증과 자격지심에 얽매인 인물입니다.

강말금 (배우 강말금) : 원래는 기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했으나, 늘 남의 불행을 찾아 눈에 불을 켜고 다니는 삶에 회의감을 느껴 때려치우고 영화판에 들어왔습니다. 하지만 영화판에 들어온 후, 속 터지는 '8인회' 멤버들 때문에 매일 천불이 나는 인물입니다. 영화판의 공식 문제아인 황동만은 그렇다 쳐도, 동만의 말과 행동 하나하나에 파르르 떨며 분노하는 자격지심 끝판왕인 남편 박경세의 모습에 극도의 창피함을 느낍니다. 마음 같아서는 둘 다 인생에서 아웃시키고 싶어 하며, 남편에겐 이혼을 경고하고, 동만에겐 준비도 안 된 상태로 링 위에 올려서 데뷔를 시켜버리겠다고 으름장을 놓습니다. 제대로 준비되지 않은 인간이 링 위에서 개 떨듯 떨다 나가떨어지는 꼴을 보며 정신을 차리게 만들겠다는 냉철 하면서도 현실적인 인물입니다.

오정희 (배우 배종옥) : 연기할 때만큼은 무당이 접신한 것처럼 다른 세계로 가며, '오정희'가 아닌 다른 사람으로 살고 싶어 했던 인물입니다. 서울 변두리에서 남자가 술에 취해 여자를 패고 아이들이 내동댕이쳐지던 불우한 동네에서 자랐으며, 그 과거 속의 자신을 철저히 부정하고 싶어 했습니다. 화려한 세계에 대한 동경이 아니라, 오직 '그 동네의 오정희'만 아니면 된다는 일념으로 버텨 결국 대한민국 원탑 여배우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하지만 20년 동안 옷장 깊숙이 썩혀두었던, 철저히 끊어버렸다고 믿었던 그 과거가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며 위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장미란 (배우 한선화) : 오정희가 재혼하면서 얻게 된 의붓딸입니다. 국내 최고 배우인 엄마의 후광 때문에 늘 스트레스를 받으며 감정적인 골이 깊어져 있습니다. 엄마인 오정희는 배우로서의 '아우라'와 대중과의 거리 유지를 요구하지만, 미란은 이를 귓등으로도 듣지 않습니다. 그녀의 치명적인 결점은 '연기가 안 된다'는 것인데, 발연기라서가 아니라 감정 조절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극 중에서 사랑한다고 말하면 상대 배우를 실제로 열렬히 사랑해 버리고, 죽여버리고 싶다고 하면 정말 죽이게 미워하는 인물입니다. 사람을 가리지 않아 영화판에서 '이 바닥의 쩌리'로 유명한 황동만, 변은아와 어울립니다.

최필름 대표 (배우 최원영) : 사람에겐 분명히 '급'이라는 게 존재한다고 믿으며, 눈앞에 알짱거리는 무능한 인간들을 싹 다 치워버리고 싶어 하는 냉혹한 인물입니다. 특히 황동만을 눈엣가시로 여겨,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독설을 퍼부어 동만의 가슴에 대못을 박아버립니다. 돈이 되는 인간에겐 간과 쓸개도 빼주지만, 돈이 안 되는 인간은 철저히 멸시하는 전형적인 '강약약강'의 인물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위선과 악행을 숨기지 않고 대놓고 행함으로써 묘한 쾌감을 주는 독특한 빌런 캐릭터입니다.
2. 거창한 성공 신화가 아닌, 안온한 구원의 여정
작품의 주인공은 영화감독을 꿈꾸지만 현실은 문창과 지망생들을 가르치며 겨우 생계를 이어가는 30대 만년 지망생 '황동만'입니다. 황동만은 좋은 영화를 보면 아이처럼 눈물을 흘리지만, 정작 잘나가는 동료들의 영화에는 사정없이 '초 치기' 악평을 날려 업계에서 눈 밖에 난 단단히 글러먹은 츤데레 캐릭터예요. 그런 그의 앞에 나타난 구원자 같은 인물이 바로 기획 PD이자 작가인 '변은아'입니다. 변은아는 황동만의 시나리오 속 핵심적인 문제점을 뼈 때리듯 날카롭게 지적하면서도, 그의 내면에 숨겨진 동물적인 인간미와 재능을 유일하게 알아봐 주는 인물이에요.
여기에 황동만과 애증으로 얽힌 영화인 모임 '8인회'의 중심이자 라이벌 감독 '박경세', 그리고 황동만의 글을 알아보고 실전의 링 위로 끌어올려 주는 영화사 대표 '고혜진'이 가세하면서 아주 촘촘하고 쫄깃한 인물관계도를 완성합니다. 특히 작가 '영실이'로 불리는 변은아와 복잡한 상처로 얽힌 친모 '오정희', 그리고 황동만의 데뷔작에 힘을 실어주는 명품 배우 '노강식'까지 합류하며 극의 무게감을 더해주더라고요. 출연진들의 탄탄한 연기력과 인물들 손목에 채워진 '감정 워치'라는 독특한 설정 덕분에 첫 화를 틀자마자 스크린 속으로 깊숙이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줄거리 : 인생의 밑바닥에서 실전의 링 위로, 흥미진진한 줄거리 요약
이야기는 주인공 황동만이 영화진흥협회 제작지원 심사에서 또다시 떨어지고, 동료들의 단톡방에서 집단 따돌림(왕따)을 당하며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는 것으로 본격적인 시동을 겁니다. 세상에서 유일하게 자신을 받아주던 곳에서조차 '썩은 귤' 취급을 받으며 밀려난 황동만은 깊은 자괴감에 빠져들게 돼요. 이때 진짜 제 가슴이 다 철렁하고 눈물이 핑 돌더라고요. 돈 한 푼 없이 형의 월세방에 얹혀살며 "잘나서 나를 증명할 수 없을 땐 망가져 나를 증명한다!"라고 외치며 길바닥을 전속력으로 달리다 넘어지는 동만의 모습은 참 안쓰러우면서도 지독하게 현실적이었습니다. 그런 그를 건져 올린 변은아 PD는 동만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가슴이 뛸 거다, 당신은 천 개의 문이 열려 있는 멋진 사람"이라는 통찰을 건네며 그에게 다시 창작의 파워를 불어넣어 줍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상처를 공유하며 급속도로 가까워집니다. 변은아 역시 가장 가까운 존재인 엄마 오정희로부터 버려진 깊은 상처를 가졌고, 전 남친 마재영에게 아이디어를 도용당하는 아픔을 겪고 있었거든요. 서로의 감정 워치에 뜬 '알 수 없음'이라는 슬픔의 신호를 알아본 두 사람은 서로를 꽉 끌어안으며 완벽한 파트너가 되기로 약속합니다. 이후 황동만은 자신의 반려묘 치료비를 위해 손을 댔던 사채업자의 협박에 당당히 맞서며 그 지독한 무서움을 시나리오 속 악당의 생생한 디테일로 승화시키는 기염을 토해요. 기어코 최종 수정고인 '날씨를 만들어드립니다'를 완성해 낸 동만은 영화사 대표 고혜진의 결단으로 드디어 꿈에 그리던 제작 계약서에 사인을 하게 됩니다. "링 위에 올라가서 한번 얻어터져 봐. 못 도망가"라는 고혜진의 서늘한 경고와 함께, 황동만은 비로소 구경꾼이 아닌 주인공으로서 진짜 실전의 링 위에 오르게 됩니다.
결말 : 섣부른 낭만 대신 마주한 코미디 같은 현실
이 드라마의 가장 훌륭하고도 소름 돋는 지점은 결코 데뷔와 성공을 아름다운 판타지로 포장하지 않았다는 데 있습니다. 계약서에 사인만 하면 모든 게 탄탄대로일 줄 알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어요. 주연 배우 노강식의 스케줄 문제와 현장 갈등으로 크랭크인이 연기될 위기에 처하자 동만은 다시금 조급함과 불안감에 휩싸입니다. 그 과정에서 오랜 숙적이었던 박경세 감독과 머리를 맞대고, 과거 함께 영화를 순수하게 사랑했던 시절을 떠올리며 무릎을 꿇고 진심 어린 사과를 건네는 장면은 묘한 뭉클함을 자아냈습니다. 결국 우여곡절 끝에 조기 크랭크인에 돌입하지만, 막상 메가폰을 잡은 현장은 생각처럼 흘러가지 않았어요. 원하는 장면이 나오지 않아 스태프들의 신뢰가 흔들리고 말도 못 할 패닉 상황이 오자, 참다못한 베테랑 배우 노강식이 대신 현장을 지휘하고 무기력증에 빠진 황동만 감독을 실제로 두들겨 패면서(...) 기어코 영화를 끝까지 완주해 냅니다. 이 장면을 보면서 역시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는 말이 딱 맞다는 생각이 들며 헛웃음이 나오더라고요.
결국 영화를 멋지게 완성해 내며 데뷔에 성공한 황동만은 한국영화상 신인감독상 트레디를 거머쥐게 됩니다. 무대 위로 올라간 그가 "영실아, 삼촌 검색된다. 은아씨 진심으로 고맙다"라며 자신의 조카와 변은아에게 최고의 영광을 돌리는 결말은 가슴이 먹먹해질 만큼 큰 카타르시스를 선사했습니다. 제 주관적인 평점은 5점 만점에 4.8점을 주고 싶을 만큼 오래간만에 만난 인간미 넘치는 수작이에요. 화려한 성공 신화 대신 "내 인생은 끝까지 코미디일 것 같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링 위에서 대차게 얻어맞으며 나아간다"라는 정직한 메시지를 던져주거든요. 매일 똑같은 일상에서 자신이 무가치하다고 느껴져 괴로워하는 직장인 분들이나, 꿈과 현실의 괴리 앞에서 치열하게 방황하고 계시는 이 시대의 모든 청춘분들께 이 드라마를 정말 꼭 추천해 드리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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